[传媒 : ]    인물잡지_ 분재예술원을 만든 한국판 우공 이야기 2014.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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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재예술원을 만든 한국판 우공 이야기

저명한 분재예술가인 성범영 선생은 3만 3천㎡ 면적의 한국 분재예술원 주인이다. 성범영 원장은 수많은 각국 정객들을 접대한 바 있다. 후진타오, 장쩌민 전 국가 주석도 분재예술원을 방문하여 글을 남겨두었다. 최근 들어 한국어판, 영문판에 이어 그의 저서 ?생각하는 정원?의 중문판‘思索之苑’이 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편안한 옷차림의 성 선생과 악수를 했다. 오랜 세월 힘든 노동으로 마디마디가 굵고 거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장수눈썹(짙은 눈썹) 아래 두 눈에 미소를 머금은 채, 낭랑한 목소리로 흥미진진하게 자신과 분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30여 년 전 성 선생은 서울에서 잘 나가던 사업, 편안한 생활을 접고 진정한 농부가 되어 3만 3천㎡에 달하는 자신의 땅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노동한 끝에 척박하기 그지없던 땅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녹색의 정원으로 가꾸어놓았다. 분재에 대한 그의 집념과 나무에 대한 사랑에 수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고, 또한 이를 통해 중국과 인연을 맺은 그에게 중국인들은 ‘생태계의 우공’이란 별명을 지어주었다. 농장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1968년 제주도 땅을 구입하기 전, 성범영은 한창 상승기류를 타고 있던 사업가였다. 그는 서울의 몇 몇 번화한 상가거리에 자신의 와이셔츠 맞춤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적은 수량이라도 품질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신조를 바탕으로 각국 유명 브랜드 상품을 구매하여 돋보기로 구매한 제품을 들여다 보면 1㎝ 안에 시침을 몇 개나 꽂았는가를 살펴보았으며, 이를 기준으로 자신의 제품을 만들었다. 그는 고객들의 수치를 일일이 장부에 기록하고 고객카드를 만들었기 때문에 고객들은 전화 한 통이면 셔츠를 맞출 수 있었다. 세심한 경영방식으로 인해 그의 가게는 날로 번창하였다. 특히 주한 외국인들은 신체 수치가 일반 한국인들과 달랐기 때문에 그의 가게를 애용했다. 당시 그의 공장은 24시간 철야로 가동되었다. 1970년 그는 셔츠가공 수출 공장을 세우기 위해 토지를 매입할 정도였다. 그러나 어느 날 제주도 친구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은 그는 친구의 건의에 따라 전혀 주저하지 않고 제주 땅을 구입하였고, 그로부터 그의 일생은 또 다른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농촌에서 출생한 성범영은 어려서부터 나무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그는 시간만 나면 근교 꽃밭을 돌아보며 그곳 분재에 흠뻑 빠져들었다. 내 농장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곳에 나무를 심고, 아름다운 분재를 키울 수 있다면. 그러나 당시 그의 현실로 비추어 볼 때 이런 꿈을 실현한다는 것은 너무 요원한 일이었다. 군대를 제대한 후 그는 고향에 과수원을 열어볼 생각으로 황무지를 개간한 적도 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제주도의 땅을 매입한 후 그는 다시 농장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우선 급선무는 농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토지를 더 매입하는 일이었다. 이에 그는 사업으로 큰 돈이 들어올 때마다 다시 인근의 땅을 사들였다. 이렇게 24번에 걸쳐 땅을 사들였고, 당시 매입한 땅이 바로 현재 분재예술원의 근거지가 되었다. 그가 매입한 땅은 경작지도 있고, 나무가 무성한 곳도 있었으며, 심지어 가시덤불만 울창한 황무지도 있었다. 오늘날의 생기발랄한 모습과는 전혀 거리가 먼 땅이었다. 성범영은 먼저 자주 제주도에 들러 땅을 개간하고 담장을 쌓았으며, 대문을 만들고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1970년대, 지금의 분재예술원이 자리한 저지리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등불 아래 일을 해야만 했고, 수돗물도 없어 빗물을 받아 생활용수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생활의 불편함은 이 한국 ‘우공’의 열정을 실현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공의 광적인 집착으로 자신이 그리던 농장을 이루기 위해 매진하던 시절, 그는 겨우 한 달에 한 번밖에 제주에 내려올 수 없었다. 그러나 이후 점차 제주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져 때로 한 번 내려온 후 2,3개월이나 머물다 가기 일쑤였다. 1974년, 그는 아예 거주지를 제주로 옮기고 본격적인 농부 생활을 시작했다. 반면 서울의 공장과 사업은 모두 아내에게 맡겨버렸다. 어느 날 제주를 방문한 그의 친구 몇 몇이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돌을 나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서울로 돌아가 그의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서 정신과 진찰을 한 번 받아보세요.” 제주도는 화산섬이다. 성범영이 매입한 땅도 다른 제주도 지역과 마찬가지로 돌이 많아 개간이 무척 힘들었다. 또한 당시 섬에는 돌을 파내는 중대형 설비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여느 노동자처럼 삽으로 돌을 부순 다음, 빌려온‘수레’에 담아 옮겨야 했다. 이렇게 몇 날 동안 씨름을 해도 겨우 2㎡ 정도밖에 손을 볼 수 없을 때도 있었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고된 노동으로 성범영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 어느 날 작업을 하던 중 그는 갑자기 목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밤이 되어 도저히 고통을 참을 수 없었던 그는 바닥에서 몸을 뒹굴며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가까스로 밤을 보낸 후 아침이 되어 그는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추간연골이 돌출되었다고 하면서, 제주도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하니 서울 큰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진통제를 맞은 후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가서 50일이 넘게 치료를 받았다. 그는 이후에도 이와 유사한 수술을 6번이나 받았다. 수차례에 걸친 부상과 수술로 그는 많은 후유증을 앓고 있다. 지금도 허리와 다리에 늘 통증을 느끼기 때문에 빨리 걷지 못한다. 수술을 받고 난 후 아내는 안심이 되지 않아 아이들을 남겨두고 제주도로 내려와 그를 간호했다. 그 후 아내는 계속 제주에 남아 하루 20여 명이 넘는 이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손님을 위해 차를 내오는 등은 물론이고 나무에 물을 주거나 심지어 새끼 돼지의 출산을 돕기도 했다. 이런 시간이 계속되면서 아내의 체력도 한계에 도달했다. 아내는 매일 아침 일어나 울먹거리며 이렇게 기도했다. “오늘도 이 노동을 견뎌낼 힘을 주시옵소서.” 몇 년이 흐른 후 이 부드럽고 현숙한 한국 여성도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남편에게 이렇게 애원했다. “여보, 이제 나랑 아이들을 놔 줘요. 난 서울 가서 셔츠 공장으로 돈을 벌 테니 차라리 다른 이를 고용해서 쓰세요.……” 자신이 쓰러지면 아이들을 돌볼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에 제주를 떠나기로 결심한 그녀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정리를 하기 위해 주방을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깨어난 그녀는 그 순간 영원히 남편 곁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시를 지었다. 기독교 신자인 성범영 부부는 이 시를 주님의 계시로 여기고 있다. 지금 분재예술원 한 귀퉁이에 세워져 있는 시비엔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 [ 영주원 시문 ]  우주촌에 아주 작은              강하고 저력있는 민족             은혜의 땅 한국이 있다.            그 땅끝 남쪽으로               환상의 섬, 아름다운 평화의 섬        시각으로 느낄 수 있는 산물이 있다.      서회선쪽 멀리 떨어진             중산간(당마루)에 가시와 엉겅퀴와      작지로 버려진 곳이 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하나님의 멍에 속에              순종하는 은혜의 땅이라           뜨락은 젖과 꿀이 흐르는            생명체의 예술인                분재, 정원수, 아열대 식물, 돌         물의 조화를 이루는              섭리의 땅이 숨쉬고 있다.            예술원을 만든 우공 처음 제주도에 뿌리를 내릴 때 성 원장은 그저 농장 하나에 편안한 집을 짓고 이 농장에 분재와 나무를 심고 싶었을 뿐이다. 당시만 해도 언젠가 분재를 테마로 한 공원을 짓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에 전환을 맞이했던 것은 1987년 어느 날이었다. 제주도 관계기관에서 어떤 이가 그를 찾아와 제주에 그럴 듯한 관광지가 없으니 그가 키운 분재로 관광농장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해왔다. 그러나 분재공원을 운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 원장도 이전에 몇 몇 한국과 일본의 재력가가 분재공원을 만들고자 했으나 끝내 도중에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그는 점차 분재예술원을 향한 청사진에 깊이 매료되기 시작했다. 이에 그는 공장을 짓기 위해 서울에 매입한 1만 여㎡ 땅을 모두 팔고 이어 서울에 있는 택지, 계동의 집 및 제주도에서 사들인 임지를 모두 매각하였다. 심지어 한창 잘 나가던 서울 가게까지 모두 팔아 전 재산을 분재예술원을 위해 쏟아 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 원장은 분재예술원이 확실히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지 알고 있던 상태가 아니었다. 또한 자신의 분재기술에도 자신이 없었다. 그는 우선 분재에 관한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고 홀로 일본에 가서 공부를 했다. 일본인들은 하얀 담을 쌓아 분재를 전시하지만 성 원장은 다른 나라의 방식이 아닌 한국의 독특한 방식으로 분재를 전시하고 싶었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한 그는 제주도의 돌을 생각해냈고 이에 이웃들로부터 크고 작은 돌들을 수집하는 한편 돌로 만들어진 생활용품 심지어 서울에서 돌로 만든 맷돌까지 사들였다. 주위 사람들은 이런 그를 보고 ‘돌미치광이’라 불렀다. 분재예술원은 완전한 설계도가 없다. 구해 온 돌은 어디에 놓아야 할지조차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성 원장 혼자 보폭으로 길이를 잰 후 마음속에 설계도를 그려가면서 완성한 것들이다. 현재 분재예술원에는 원림이 갖추어야 할 모든 기본 요소, 즉 나무, 분재, 돌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눈에 그의 원림이 중국식도 아니고 일본식도 아니며, 오직 성 원장 자신의 색채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언젠가 미국의 유명한 공원 조형회사 Arnold Parma에서 관계자들이 분재예술원을 관람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성 원장의 성과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이어 그에게 설계도를 보자고 요청했다. 전문가 앞에서 공원 설계도가 없다고 말하기가 쑥스러웠던 성 원장은 다른 곳에 뒀다고 얼버무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대방의 계속된 질문에 그는 하는 수없이 원래부터 설계도 같은 것은 없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분재예술원의 설계도가 자신의 머리 속에 있다는 그의 답변에 그들은 그저 놀랄 따름이었다. 불철주야 3년에 걸친 고된 노동 끝에 1992년 7월 30일 분재예술원은 드디어 개원했다. 이후 많은 이들이 방문하면서 좋은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런 행운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97년 금융위기가 폭발함에 따라 분재예술원의 방문객들도 극감하기 시작했다. 1998년 10월, 성 원장은 은행으로부터 경매 통지를 받았다. 분재예술원 토지에 경작에 적합한 토지가 아니기 때문에 관련부서에서 이에 합당한 가격을 매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가 수 십 년에 걸쳐 피땀을 흘려 키운 나무와 분재를 포함한 분재예술원 전체는 황무지로 간주되어 등급이 정해지고 말았다. 성 원장은 황무지 등급으로 저당을 잡아 은행에 대출을 신청했으나 그 때마다 번번이 무산되고 말았다. 경매가 있던 날, 성 원장은 경매장에 가지 않았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돌담을 쌓았다. 어쩔 수 없이 이곳을 떠나야 한다 해도 이 돌담들이 분재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경매는 낙찰되지 않았다. 은행은 곧 이어 두 번째 경매날짜를 공고했다. 이 때 미디어에서 보여 준 관심은 성 원장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방송, 신문, TV 보도는 사회 전체의 관심을 유도했다. 분재예술에 관심 있는 많은 이들이 그에게 도움을 손을 내밀었다. 물질적, 정신적으로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현재 분재예술원은 위기를 벗어나 다양한 경영방식을 향해 발전하고 있다. 나무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 성 원장은 나무를 자신과 평등한 생명체로 사랑한다. ?생각하는 정원? 내용의 거의 절반은 각기 다양한 나무 품종의 특징에 대한 이야기이다. 분재 하나하나마다의 내력, 분재들을 키우면서 있었던 일들, 주의해야 하는 사항 등등. 수 십 년간 키워온 분재에게 있어 그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사랑으로 자신이 키운 분재의 매일매일 새로운 변화들을 이야기하고 흥미진진하게 그 가운데 있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 거리들을 늘어놓는다. 그의 말에 분재에 대한 따스한 사랑과 분재의 성장을 지켜보는 기쁨이 가득 넘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언젠가 성 원장이 장쑤(江蘇)의 한 도시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원림에서 노동자들이 나무를 옮겨 심고 있었다. 그들이 큰 나무 한 그루를 기중기로 파냈을 때는 이미 퇴근 시간이 다 된 상태였다. 그러자 그들은 나무를 그 자리에 내팽개치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나무뿌리에 들려나온 흙이 부족한데다 이를 보완해줄 만한 기술도 없는 것을 보고 성 원장이 재빨리 그들에게 말했다. “이 나무가 피를 흘리고 있소! 마치 부상을 입고 땅에 쓰러진 사람이나 마찬가진데 이걸 이대로 내버려두고 그냥 간단 말이오?” 이 말을 들은 노동자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고, 그 옆에 서 있던 식물원 원장도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 원장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온 그는 밤새도록 그 나무가 걱정이 되었다. 나무를 위해 바람과 추위를 막아주기 위해 성 원장은 예술원에 방풍 담을 쌓고 방풍림을 심었다. 원래는 한 겹으로 쌓아올렸지만 후에 한 겹으로는 바람이나 추위를 막기 힘들다고 생각한 그는 아예 담을 허물어버리고 두 겹으로 다시 담을 쌓아올렸다. 또한 매년 돌담의 높이를 올려 방풍림을 보조토록 하고 있다. 담을 높이는 일은 주로 관람객이 적은 겨울에 이루어지는데 항상 성 원장 자신과 직원 몇 명의 몫이다. 일단 돌을 쌓고 나면 다시 내릴 수 없는데다 방풍효과를 보다 정확하게 확보하기 위해 그는 항상 직접 돌 쌓는 일을 한다. 70이 가까운 고령의 나이에 추위를 이기기 위해 두터운 솜저고리를 입은 그는 먼저 구해 온 돌을 내벽과 외벽용으로 분류한다. 이어 직원들이 날라 온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다가 전체 모습을 둘러보기 위해 수시로 담 위에서 뛰어내린다. 이렇게 하루를 지내다보니 성 원장은 늘 허리와 다리에 통증이 심해 잠을 못 이룰 때가 많다. 이렇게 힘든 노동 속에 성 원장은 점차 나무와 함께 한 세월 속에 여러 가지 이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잠 못 이루는 밤이면 그는 이런 생각들을 글로 정리했다. 그는 낮에는 농부, 밤에는 시인이자 철학자가 되었다. 그의 글에는 미적 감각으로 가득한 문자를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어쨌거나 오늘처럼 색채가 진하고 그림자가 선명한 날씨면 수피가 매우 아름답다.” 나무를 기르면서 배운 철학을 여행자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성 원장은 직원들을 훈련시켜 직원들이 직접 관람객들에게 나무 해설을 하도록 했다. 설명을 하기 전 해설사들은 관람객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관람하시기 전에 모두 두 눈과 마음을 활짝 열면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나무 한 그루를 심을 수 있습니다.” “보통 4, 5년이 지나면 전나무 잎은 부드러워집니다. 그런 걸 보면 사람이 젊은 시절에는 성격이 거칠지만 나이가 들고 나면 그렇게 고집을 부리면 안 된다는, 조금은 부드러워져야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나이가 들어서 고집을 조금 덜 부리고 반면에 젊은이들은 조금만 더 책임감을 갖는다면 우리가 생활하는 이 세상에 온정이 가득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화분을 바꾸고, 흙을 바꾸면 나무는 자기가 사지에 왔나 생각합니다.나무는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뿌리를 내립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지요. 소식하는 사람이 많이 먹는 사람보다 장수한다고 합니다. 아마도 생명력을 자극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 모든 가정, 모든 국가 역시 분재를 관리할 때처럼 일정한 시간 간격에 따라 체제와 관념을 새롭게 탈바꿈하지 않으면 생명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세상을 살면서 때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러나 설사 다 비운 마음이라 해도 몇 년이 지나면 분갈이를 한 화분처럼 뭔가가 가득 채워집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살아있기 때문에, 인생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분재예술원 나무 앞에서 관람객들은 점점 해설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의 감동을 느낀다. 2003년 이후, 점차 많은 관람객들이 해설사들의 해설을 듣기 위해 분재예술원을 찾아오고 있다. 중국과의 인연 그를 취재하던 중, 성 원장은 어젯밤에 꾼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꿈에서 그는 물길이 거센 강가에 서있었다. 그 때 갑자기 그의 앞에 다리 하나가 나타나 맞은 편 언덕까지 길을 이어주었다고 한다. 자꾸만 꿈 이야기를 생생하게 되새기는 그의 모습이 마치 아직도 꿈속에 있는 듯 했다. 그는 이 꿈이 분명 중국에서 책을 출간하는 일이 매우 순조로우리라는 것, 또한 중국과 한국 사이에 어떤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언젠가 중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동안 저는 중국을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고심했습니다……중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심을 했다”라는 그의 말은 결코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한참 힘들 때 중국 지도자들의 분재예술원 방문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이로 인해 오늘과 같은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이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언젠가 중국을 위해 무엇인가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995년 11월 17일, 장저민이 분재예술원을 방문했고 바로 그 날, 그 해 4월에 분재예술원을 방문한 ?인민일보? 총편집장인 판징이(范敬宜)가 쓴 ‘분재예술원방문기’가 신문에 게재되었다. 장저민의 분재예술원 방문은 여론의 관심을 끌었고 그 후 분재예술원 관람객 수가 대폭 상승하기 시작하여 초창기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1998년 4월 30일,후진타오가 분재예술원을 방문하였고 이어 중국지도층 인사들의 방문이 이어지면서 분재예술원과 중국은 관계도 날로 밀접해지면서 관리들과 한국에 관광을 온 일반인들이 시간을 내어 예술원을 관람했다. 계속해서 이어진 중국인들의 방문으로 한국정부는 분재예술원의 민간외교성과를 높이 평가하여 2001년 외교통상부에서는 분재예술원에 ‘2001년 외교창구공로상’을 수여했다. 이렇게 해서 성 원장은 많은 중국인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초청을 받아 중국을 방문하여 강연회를 열었다. 2000년, 그는 베이징 임업대학 총장의 초청으로 원림학계 교수와 조경학과 학생들에게 강연을 했다. 강연이 끝난 후 관련 인사는 성 원장의 강연 내용이 다음 날 전국 원림정책회의에 반영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2002년 5월,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1천 현(縣) 프로젝트’1주년 기념대회에 초대받아 ‘농부의 일생’이란 주제로 강연을 했다. 금년에는 세계원림박람회가 선양(瀋陽)에서 열릴 예정이다. 2004년부터 시작해서 성범영은 이미 여러 차례 선양을 방문, 시찰하고 여러 가지 구체적인 건의를 내놓은 바 있다. 성 원장은 이것이 환원의 기회로, 중국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하였다. 중국 매체 역시 성범영 원장과 그의 분재예술원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고, 한국의 농부 성 원장 역시 이를 통해 많은 중국인 친구를 사귀고 그 중 일부와는 수 년 동안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환징의도 그 중 한 명이다. 중국에 올 때마다 성범영은 이제는 절친한 친구가 된 환징의와 연락을 취하고 있다. 이번에 성 원장은 그의 중문판 ?생각하는 정원?에 환징의선생이 쓴 서문을 실었다. 취재 도중 성 원장이 가장 많이 한 말은 “분재는 중국에서 시작되어 먼저 한국에 전해지고 그 후 일본에 전해졌습니다. 지금 분재예술의 발상지인 중국의 분재기술이 이처럼 낙후된 것에 대해 무척 답답하고 또한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라는 것이었다. 중국인은 예로부터 대자연을 사랑하고 또한 상상력이 풍부하기로 매우 정평이 나 있는 민족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우수한 고대문명을 창조하였고, 원림 조경, 문학, 회화 등 예술을 집대성한 분재조형예술을 창조하였다. 그러나 이제 일본은 세계 일류의 분재기술을 통해 분재 종주국의 신분으로 세계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영국 백과사전에는 분재라는 명칭을 BONSAI라는 일본어 발음을 표준으로 삼고 있다. 1964年,일본은 도쿄올림픽에서 정식으로 세계에 분재문화를 선보였다. 당시 분재 공원으로 선보인 사이타마 현 대궁분재촌은 지금까지도 일본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매년 일본은 분재와 분재도구 수출을 통해 대량의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아마도 사랑이 깊고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리라. 성 원장은 중국 각지의 녹지벨트와 유사한 ‘천록일면(千綠一面)’현상과 분재기술의 낙후, 노동자들의 낮은 소양 등에 대해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외국인이 이처럼 자신의 나라를 비판하는 소리를 들으며 기자의 마음도 편안하지가 않았던 터라 자꾸만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러나 취재가 끝난 후 마음을 가라앉히고 성 선생의 글을 읽으니, 분재에 있어 후발주자로 중국과 한국을 훨씬 앞지르고 있는 일본에 대한 걱정, 중국이 하루빨리 분재예술에 있어 국제적인 지위를 회복했으면 하는 그의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기자는 다시 한 번 그의 비판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분재예술원은 이미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지만 성 원장은 아직 그의 계획이 반 밖에 성취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고 했다. 방문자 박물관을 세워 관람자들이 남긴 글과 서화작품을 전시해야 하고, 분재교육관을 세워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분재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하고……항상 가족과 직원들에게 그의 이런 생각들을 이야기하다보니 그는 ‘몽상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잡석들을 모아 이처럼 푸르름이 가득한 환상적인 예술원으로 일구어낸 한국의 우공이 분명 그의 새로운 꿈들을 하나하나 성취해나가리라 믿고 있다.

중국 인물잡지 - 글 : 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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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세계언론 차이나타임지 차이나타임지 2014-06-0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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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세계언론 인물잡지_ 분재예술원을 만든 한국판 우공 이야기 2014-06-07 1598
46 세계언론 북방인_ 한국 우공 성범영 2014-06-07 1607
45 세계언론 출판광장_ 한 한국농부의 나무인생-‘생각하는 정원’출판기념회 … 2014-06-07 1750
44 세계언론 광명일보_ ‘생각하는 정원’이 불러일으킨 사색 2014-06-07 1661
43 세계언론 광명일보성범영과 그의 <<분재예술원>> 2014-06-07 1538
42 세계언론 농민 대사의 한중(韓中) 소회(所懷) 2014-06-07 1638
41 세계언론 절강성 덕청현 환경보호국_ 생태 우공과 그의 섬 생애 2014-06-07 1612
40 세계언론 인민일보_ 도시의 부를 가져다주는 보물로 만들자 2014-06-07 1530
39 세계언론 인민일보_ 분재예술원과 인생 2014-06-07 1595
38 세계언론 신민반보_ 제주 '미치광이' 와 가족의 섬 생애 2014-06-07 1516
37 세계언론 인민론단_ 초목의 탄식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2014-06-07 1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