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传媒 : ]    북방인_ 한국 우공 성범영 2014.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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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우공 성범영

성범영 선생은 저명한 분재예술가이다. 3만 여 평방미터에 달하는 한국분재예술원의 주인으로서 그는 각 나라 정계 요인들을 수없이 많이 맞이했었다. 중국 지도자 후진타오, 장쩌민도 그의 정원을 참관하고 글을 남겼다. 지금 그의 한글판과 영문판의 저작 ‘생각하는 정원’이 중문판으로 인민출판사에 의해 출판되었다. 30여 년 동안 성선생은 서울의 편안한 생활을 포기하고 진정한 농부가 되어 3만여 평방미터가 되는 땅에서 별을 이고 나가 달을 지고 돌아오며 부지런히 노동하였다. 하여 그 메마른 황무지를 오늘 날 관광객이 수없이 밀려드는 녹색정원으로 가꾸었다. 분재사업에 대한 그의 집착과 추구, 나무에 대한 뜨거운 사랑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이로 하여금 중국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매스컴들에서는 그를 ‘생태 우공’이라고 부른다. 농장에 꿈을 실현하다 지난 세기 60년대 말, 제주도에 땅 한 자락 사기전만 해도 성범영은 사업이 상승궤도에 오른 상인이었다. 서울 번화가 몇 곳에 와이셔츠 가게를 가지고 있었다. 열심히 경영했기에 그의 와이셔츠 가게는 날 로 흥성했다. 특히 한국에 상주하는 외국인들은 와이셔츠 치수가 특별하다보니 늘 그의 가게에 와서 옷을 맞춰가곤 했다. 그 때 그의 공장은 매일 24시간 바삐 돌아가야 했다. 1970년에는 수출공장 부지까지 사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제주도의 한 친구의 전화를 받고는 주저 없이 제주도의 땅 한 자락을 샀다. 그 때부터 그의 생활궤도는 다른 방향을 향했다. 시골에서 자란 성범영은 어려서부터 나무에 천연적인 친근감을 느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공부하면서도 시간만 있으면 근교의 화원을 구경하러 가곤 했다. 그곳의 아름다운 분재들은 늘 그의 마음을 깊이 사로잡았다. 그는 자기의 분재농장을 갖고 싶었다. 농장에 여러 가지 나무를 심고 아름다운 분재를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생활이 어려운 그에게는 머나먼 꿈일 뿐이었다. 제주의 땅은 성범영의 꿈을 다시 또렷이 펼쳐주었다. 그는 우선 땅을 농장규모로 넓혀야 했다. 그 때로부터 그는 옷가게에서 번 돈을 모두 땅을 사는데 돌렸다. 그렇게 스물네 곳의 땅을 샀는데 그것이 오늘 분재예술원의 추형이다. 성범영은 제주도로 빈번히 들락거렸다. 땅을 개간하고 돌담을 쌓고 문을 만들고 나무를 심고... 지난 세기 70년대에 분재예술원이 자리할 이 땅은 아직도 황폐하기 그지없었다. 전기도 없어 초롱을 밝혀야 했고 수돗물이 없어 빗물을 받아 생활용 물로 써야 했다. 생활상에 애로가 컸지만 한국 우공의 열정은 막지 못했다. 그는 우공의 집요한 정신으로 용감하게 꿈을 향해 나아갔다. 처음에는 제주도에 한 달에 한번 정도 가곤 했지만 후에는 제주도에 머무는 나날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어떤 때는 2,3개월씩 있곤 했다. 1974년에는 아예 자기 호적을 제주로 옮기고 제주농부로 마음을 정했다. 서울의 공장과 가게의 중임은 고스란히 아내의 몫으로 넘겨졌다. 제주도는 화산섬이다. 성범영이 산 이 땅도 대다수 제주의 땅과 마찬가지로 돌이 많이 개간하기 힘들었다. 당시 제주도에는 돌을 파내는 중형설비가 없다보니 그는 노동자들과 함께 망치로 돌을 까서 주어내고 밀차로 밀어서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며칠동안 일해도 두어 평방미터 밖에는 개간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매일 힘든 중노동을 하다보니 성범영은 온 몸에 상처투성이였다. 어느 날 그는 일하다가 갑자기 목이 아팠다. 밤이 되었지만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잠자리에서 마구 뒹굴었다. 사나이지만 참을 수 없어 소리 내어 울었다. 겨우 날이 밝기를 기다려 의사에게로 갔지만 의사는 디스크여서 제주도에서는 치료할 수 없으며 서울 큰 병원에 가서 대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진정제를 맞고 난 성범영은 혼자서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성범영은 병원에서 50여 일 동안 입원했다. 이와 유사한 수술을 6차례나 했다고 한다. 여러 번 부상을 당하고 수술을 하다보니 몸에는 많은 후유증이 남아있다. 지금도 그는 허리와 다리가 아파 걷기가 불편하다고 한다. 수술하고 퇴원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아내는 아이들을 서울에 둔 채 남편을 보살피러 제주도로 왔다. 그 후 아내는 줄곧 그의 뒤에 있어 주었다. 매일 20여명 노동자들의 세끼니 식사를 준비하고 농장 노동자들과 관광객들에게 차를 끓여 대접했다. 나무에 물을 주고 농장 암퇘지들이 새끼 낳는 일을 살펴주었다. 그동안 아내는 체력이 극한 상태에 이르러 매일 아침 울면서 “하느님이시여, 저에게 오늘 일 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라고 기도하곤 했다. 몇 년 후 이 온순하고 현숙한 한국 여인은 끝내 남편에게 “여보, 저와 아이들을 놓아주세요. 제가 서울에 가서 와이셔츠공장을 경영해 돈을 벌어서 드릴 테니 당신은 품꾼을 사서 쓰세요...”라고 애원했다. 아내는 자신이 쓰러지면 자식들을 돌볼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제주를 떠나기로 했다. 떠나기 전에 그는 주방에 들어가 마지막 설거지를 하려고 했는데 그만 혼미해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그는 정신을 차리는 순간 다시는 남편을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내렸다. 그 날 그는 시 한 수를 썼는데 기독교를 믿는 성범영 부부는 이를 하느님의 계시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공이 공원을 만들다 성범영은 처음 제주도에 발을 붙였을 때에는 그냥 농장 하나를 가지고 편안한 집을 짓고 분재와 나무를 심어 가꾸면서 살려고 생각했었다. 언젠가 자신이 분재를 주제로 한 공원을 만들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공원을 만들게 된 계기는 1987년의 어느 날이었다. 이날 지방 정부의 관련 부문에서 그를 찾아와 이곳에 이렇다할 관광지가 없으니 그동안 키워낸 분재로 관광농원을 여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관광농원을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동안 고민에 쌓였던 성범영은 드디어 분재공원을 만드는 일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펼쳐진 아름다운 설계도는 그를 깊이 매혹시켰다. 그는 서울에 공장부지로 사두었던 임지를 전부 팔고 서울에서 한창 잘 나가는 점포마저 처분했다. 전부의 재산을 분재예술원에 쏟아 부었다. 하지만 성범영은 분재공원이 확실히 어떤 모양이어야 하는지를 몰랐다. 자신의 분재기술에도 자신이 부족했다. 그는 그때부터 많은 분재서적들을 읽고 그것도 부족해 혼자서 일본으로 가서 분재기술을 공부했다. 일본사람들은 정원의 하얀 담벼락에 분재를 전시하곤 했다. 성범영은 다른 나라의 방법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한국특색이 있는 분재를 만들고 싶었다. 그는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나서 제주도의 돌을 생각했다. 인근 주민들에게서 각종 크고 작은 돌들과 돌로 만든 각종 생활도구들을 수집했다. 도시의 골동품가게에서 맷돌을 사오기도 했다. 사람들은 뒤에서 그를 “돌챙이”라고 불렀다. 분재예술원에는 정해진 설계도가 없었다. 수집한 돌을 어디에 놓고 어떻게 놓는가 하는 것은 전부 성범영이 머릿속의 그림에 따라 배치한 것이다. 지금 분재예술원에는 원림이 갖춰야 할 기본 요소들인 나무, 분재, 정원석이 잘 갖추어져 있다. 사람들은 그의 원림은 중국식도 아니고 일본식은 더 아닌 그 자신의 선명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다. 3년 동안의 끝없는 노동을 거쳐 1992년 7월 30일에 분재예술원이 개원했다. 처음에는 반향이 괜찮았고 많은 유명인사들도 방문했다. 하지만 좋은 상황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97년 금융위기가 폭풍 마냥 아시아를 강타하면서 분재예술원의 관광객들도 대폭 줄었다. 1998년 10월 성범영은 은행의 경매처분 통고를 받았다. 첫 번째 경매는 성공하지 못했다. 은행에서는 재빨리 제2차 경매공고를 내보냈다. 이 때 매스컴에서 성범영을 크게 도왔다. 방송, 신문과 텔레비전 방송의 보도는 사회의 광범위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분재원을 아껴주시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냈다. 물질과 정신적으로 그에게 큰 힘을 주었다. 지금 분재예술원은 이미 곤경에서 벗어나 다종 경영의 방향으로 발전해가고 있다. 나무에 미친 사람 성범영은 나무를 자기와 평등한 생명으로 사랑했다. ‘생각하는 정원’에서 그는 절반의 분량에 나무들의 성격, 분재의 내력, 재배과정의 이야기들, 그리고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한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재배한 분재를 대하는 마음이 엄마와도 같다. 남들에게 자기 아이의 모든 섬세한 변화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고, 하나하나의 작은 부분까지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나무에 대한 자애로운 마음과 나무의 성장에 대한 기쁨을 읽을 수 있다. 어느 날 성범영은 강소의 한 도시를 방문하다가 마침 노동자들이 나무를 이식하는 현장을 보게 되었다. 노동자들이 커다란 나무를 기중기로 파내자 퇴근시간이 되었다. 사람들은 나무를 내버려둔 채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 나무뿌리에는 흙이 많지 않았는데 그에 대한 기술적인 보호조치도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성범영은 노동자들에게 다급히 말했다. “이 나무는 지금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환자가 땅에 쓰러져 있는데 두고 가서는 안됩니다!” 그의 말에 노동자들은 한바탕 웃었고 그 옆에 서있던 식물원 원장도 웃고 마는 것이었다. 하지만 성범영은 웃을 수 없었다. 호텔에 돌아온 후에도 그는 밤새 그 나무가 걱정돼 잠이 오지 않았다. 나무와 분재가 바람을 맞을까봐 성범영은 분재예술원에 바람벽을 만들어주고 주변에 방풍림을 심었다. 이 공사는 보통 관광객이 적은 겨울에 진행됐는데 주로는 성범영과 몇몇 노동자들이 완성했다. 돌은 한번 쌓으면 다시는 떼어낼 수 없으므로 성범영은 직접 쌓았다. 70고령에 오른 그는 찬바람을 막기 위해 두터운 솜옷을 입고 일했다. 그는 종업원이 넘겨준 돌을 받아서 가지런히 놓고는 안에 놓을 것과 밖에 놓을 것을 골라서 쌓았다. 다 쌓은 후에는 또 뛰어내려와 전체적으로 어떠한지를 살펴보곤 했다. 이렇게 하루 종일 하다보면 허리와 다리가 과로로 통증이 나서 온 밤을 설치기도 했다. 나무와 함께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성범영은 많은 도리를 깨달았다.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이런 생각들을 적어두곤 했다. 낮에는 농부지만 밤이면 영락없이 시인이나 철학자로 변하곤 했다. 그의 책에서는 아름다운 구절들을 자주 읽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뭐니 뭐니 해도 오늘 같은 날은 색이 짙어지고 음영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나무의 수피가 볼 만 하다.’라는 구절 등이다. “향나무의 잎은 보통 4,5년이 지나면 부드러워집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사람도 젊었을 때는 성질이 우락부락하지만 나이가 들면 고집만 센 것이 아니라 부드러워지셔야 합니다...어르신들은 고집을 조금만 줄여주시고 젊은 사람들은 조금만 더 책임감을 가지면 세상이 많이 부드러워 질 것 같습니다.” 분재예술원의 분재를 감상하는 관광객들은 이런 철학적인 말들이 피부로 스며와 큰 반향을 보이곤 한다. 2003년도 후부터는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분재에 대한 해설을 듣기 위해 찾아들곤 한다. 중국인연 어느 날 중국기자의 취재를 받으며 성범영은 이렇게 말했다. “한동안 저는 중국을 위해 무슨 일인가 해야겠는데, 늘 그런 생각에 고민을 했어요. 중국과는 특수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죠...” 그의 이 ‘고민’이라는 표현은 절대 스쳐 지나는 말이 아니다. 그는 중국지도자들이 그가 가장 힘들 때에 분재예술원을 방문해 그를 도와주었기에 분재예술원의 오늘이 있다는 생각을 늘 했다. 그는 이런 감격의 마음으로 중국을 위해 무슨 일인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995년 11월 17일 장쩌민이 분재예술원을 방문한 날, 이미 10월에 분재예술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 ‘인민일보’ 판징이 선생이 분재예술원방문기를 발표했다. 분재예술원에 대한 장쩌민의 방문은 국내외 언론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때로부터 관광객이 대폭 늘어났다. 이는 초창기의 분재예술원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98년 4월 30일 후진타오가 또 한번 분재예술원을 방문했다. 그 때로부터 중국정부의 고위급 관원들이 뒤에 뒤를 이어 분재예술원을 방문했다. 중국과 분재예술원의 관계는 점점 더 밀접해졌다. 많은 관원들과 한국관광을 간 민간 인사들도 짬을 내어 분재예술원을 방문하곤 했다. 수많은 중국인들의 방문으로 하여 분재예술원의 민간외교실적이 한국정부의 인정을 받으면서 2001년에 분재예술원은 한국관광부 해당 부문으로부터 ‘2001년 외교통상부 공로패’를 받았다. 그 때부터 성범영은 많은 중국인들과 친구가 되어 수차례 중국을 방문하고 중국에 와 강연을 했다. 2002년 5월에는 인민대회당에서 거행된 ‘천현공사’1주년 기념대회에 유일 외국인으로 초청되어 ‘농부의 인생’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성범영은 이를 중국에 기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했다. 분재예술원은 많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성범영은 아직도 자기 계획의 50%밖에는 완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아직도 많은 일을 꿈꾸고 있다. 방문자박물관을 만들어 관람자들이 남긴 글과 서예미술작품을 전시하고 분재교육관을 만들어 관람자들이 분재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을 배우게 하고... 그가 늘 가족과 종업원들에게 자기의 구상을 말하기를 좋아해서 사람들은 그를 “꿈동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는 30여 년 간 돌밭을 오늘의 녹색 꿈의 정원으로 만든 이 한국 우공이 그의 하나 또 하나의 새 꿈을 이루고 말 것이라는 것을 믿어마지 않는다.

중국 북방인 7월호






国内媒体 国外媒体
국내언론 황무지를 분재정원으로... '제주 愚公' 中교과서에 실려 동아일보 2015-11-24 3964
국내언론 나무로 맺은 인연... "중국은 소중한 이웃 나무" 동아일보 2015-09-14 4650
51 세계언론 흑룡강 신문_ '섬나라'의 한그루 낏낏한 불로송 중국 흑룡강 2014-06-07 2447
50 세계언론 차이나타임지 차이나타임지 2014-06-07 2158
49 세계언론 심양금보_ 화초를 가꾸는 사람도 대가로 될 수 있다 심양금보 2014-06-07 2048
48 세계언론 심양만보_ 한국의 '우공' 이 심양에서 출간좌담회를 개최 심양만보 2014-06-07 2134
47 세계언론 인물잡지_ 분재예술원을 만든 한국판 우공 이야기 2014-06-07 1543
46 세계언론 북방인_ 한국 우공 성범영 2014-06-07 1548
45 세계언론 출판광장_ 한 한국농부의 나무인생-‘생각하는 정원’출판기념회 … 2014-06-07 1699
44 세계언론 광명일보_ ‘생각하는 정원’이 불러일으킨 사색 2014-06-07 1627
43 세계언론 광명일보성범영과 그의 <<분재예술원>> 2014-06-07 1487
42 세계언론 농민 대사의 한중(韓中) 소회(所懷) 2014-06-07 1611
41 세계언론 절강성 덕청현 환경보호국_ 생태 우공과 그의 섬 생애 2014-06-07 1573
40 세계언론 인민일보_ 도시의 부를 가져다주는 보물로 만들자 2014-06-07 1495
39 세계언론 인민일보_ 분재예술원과 인생 2014-06-07 1560
38 세계언론 신민반보_ 제주 '미치광이' 와 가족의 섬 생애 2014-06-07 1485
37 세계언론 인민론단_ 초목의 탄식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2014-06-07 1710